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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2008-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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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서우석, 처음 컴퓨터를 접하던 날 어렸을 때부터 수학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수학경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곤 했었다. 수학경시대회에서 입상을 하면 보통 상품을 주었는데, 나는 상품대신 학교 컴퓨터실의 열쇠를 원했다. 당시 컴퓨터실은 학생들에게는 개방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컴퓨터를 만질 수 있는 방법은 그 길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매번 대회에 나갔고, 그때마다 입상을 해서, 자연스레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던 것이다. 그땐 삼각형의 넓이 계산과 같이 수학공식을 계산하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모른다. 소년 서우석, 프로그래밍에 푹 빠지다 이미 프로그래밍의 세계에 흠뻑 빠져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다른 공부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에는 컴퓨터 경진대회를 준비하는 모임이 있었는데, 모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프로그래밍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들을 탄탄하게 이해하고 있어야 했다. 나는 부모님의 반대로 컴퓨터를 쉽게 접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모임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운 좋게 겨우겨우 10명 중에 10등으로 선발되긴 했는데, 그 중 3명만이 대회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고 했다. 그 때 3등 안에 들기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아마도 내가 살아온 시간 중에서 가장 열심히 했던 순간이 아닌가 싶다. 새내기 서우석, 아주대를 선택하다 프로그래밍에 빠져있는 동안 학교 성적이 많이 떨어졌다. 문득 부모님을 실망시켜 드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고등학교 이후 학과공부에만 전념했고 그 결과 아주대에 합격할 수 있었다. 이미 전공은 결정한 상태였고, 어느 대학에 가느냐를 결정해야 했는데, 원서접수를 하고 면접을 보면서 아주대를 선택했다. 다른 대학에서 느낄 수 없는 신선함이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대학생활을 만끽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동아리나 학회에 가입해서 활동하는 것이다. 나는 C.C.라는 학회와 볼랜드라는 동아리에서 활동했는데, 그 때 학회에서 만들었던 프로그램들, 공부했던 내용들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원동력이라고 믿는다. 청년 서우석, 안철수 연구소에 입성하다 3학년 2학기에 휴학을 하고 ‘포씨소프트’라는 회사에서 병역특례요원으로 시작했다. 대학생활 중 외국의 컴퓨터관련 유명사이트에 글을 올린 것을 보고 ‘포씨소프트’ 사장께서 연락을 해서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그곳에서 나는 정말 열심히 회사생활을 했던 것 같다. 처음 입사했을 때 3명이었던 사원이 48명까지 성장했으니 말이다. ‘포씨 소프트’에서 액티브 튜터라는 제품을 완성하고 나서 곧바로 ‘안철수연구소’로 이직하게 되었다. 사실 ‘안철수연구소’는 대학생활을 마치기 전에 꼭 한번 도전해보고 싶은 곳이었다. 꿈은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안철수연구소’는 기술력이 뛰어난 곳이다. 그곳에서 고수라고 불릴만한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을 통해 더 많은 것을 배웠다. ‘안철수연구소’에서는 지식뿐만 아니라 그들의 마인드를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아주인 서우석, 마이크로소프트 아시아 커뮤니티 2년 연속 MVP 누구에게나 그렇듯 나에게도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모델이 있다. 프로그래밍을 진정으로 즐기고 기술적인 내용을 좋아하며 남들과 열린 마음으로 함께 생활할 수 있는 그런 사람. 그리고 그 모델 중에 하나가 마이크로소프트사의 MVP 이었다. 원래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수여하는 MVP는 아시아에서는 선정하지 않았는데, 2년 전부터 이 프로그램이 아시아권에서도 시행되기 시작했다. 첫 해에 총 21명에게 MVP를 수여했는데, 운 좋게도 그 안에 내 이름이 포함되었다. MVP에 선발되고 난 후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주최하는 각종 세미나에 발표자로 참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대외적인 활동도 많아졌다. 유학생 서우석, 미국을 경험하고 돌아오다 3년여 동안의 병역특례 후 복학하여 학교에서 지원하는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꼭 한번 경험해보고 싶었다. 나는 시카고에 있는 IIT(Illinois 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실시하는 IT집중과정 프로그램을 통해 내 꿈을 이루었다. 나는 그곳에서 동아리에 가입하고 연중 행사로 벌어지는 International Festival의 Spot-Light를 다루는 행사요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열심히 생활하려고 노력했더니 역시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었다. 친구도 많이 사귀고 그들의 문화를 배울 수 있었다. 그중 한국에 돌아오기 전 아주대생 10명이 한 팀이 되어 모토로라에서 한 인턴십 과정은 평생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특히 인턴십 기간에는 아주인의 파워를 보여주기 위해 팀원 모두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모른다. 서우석, 그가 꿈꾸는 미래는… 내가 꿈꾸는 미래는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모든 일들을 즐기는 것이다. 소프트웨어 공학과 테스팅, 디버깅 쪽에 관심이 많아서 해당 분야의 연구실에 입학하거나 사회경험을 쌓아서 20년쯤 후에는 내가 존경하는 교수님들처럼 인재양성에 모든 힘을 쏟아 붓고 싶다. 그 꿈을 이루는 과정에서 보다 많이 경험하고 항상 자만하지 않으며 오늘에 최선을 다하고 싶다. 또 꿈은 항상 원대하게 가지되 그 꿈을 이루기 위한 오늘의 열정이 내일을 살아가는 힘이 될 수 있도록 나를 길들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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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박성숙
- 작성일2008-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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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박성숙
- 작성일2008-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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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의 경쟁, 그 최전방에서 신세계를 열어가다 김명찬 인텔코리아 CEO 김명찬 동문을 만나기로 한 시간. 사장실로 곧 안내를 받겠거니 생각하며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인터뷰가 진행된 곳은 작은 회의실. 김명찬 동문은 사장실을 따로 두고 있지 않았다. 대개의 외국계열 회사가 그러하듯 유연한 기업문화의 한 단면이려니 생각하면서도 회사 대표가 직원들과 파티션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일한다는 사실이 사뭇 신선하기만 했다. 입사 13년 만에 최고경영자로 김명찬 동문이 인텔코리아의 대표로 선임된 것은 지난 2001년 3월. 88년에 입사한지 13년 만의 일이었다. 고속승진이었다. 40대에 외국기업 CEO에 오른 비결이 무엇일까. “세일즈 엔지니어로 근무하는 동안 리셀러, 아키텍처 영업 등 다양한 기술영업을 담당해왔기 때문에 시장과 고객을 보는 안목을 갖췄다고 평가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그는 인텔이라는 회사의 비전을 바라보며 차근차근 성장해 온 정통 인텔맨이다. 채널관리, 재판매 부문, 아키텍쳐 세일즈, 투자 담당 상무를 거치면서 한 계단씩 CEO로서의 능력을 준비해온 것이다. 세계적 기업을 이끌어가는 힘, 집중하는 마음 인텔은 시장 점유율85∼90%를 차지하는 중앙처리장치(CPU) 최대 메이커다. 전 세계 45개국에 85,000여명의 직원이 움직이고 있는 글로벌 기업으로 미국의 본사 외에도 중국, 일본, 대만 등 전 세계에 75개의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지난 35년간 세계를 바꿔 온 컴퓨터, 그리고 인터넷 혁명을 이끄는 기술을 개발해온 회사답게 최근에는 인터넷 무선 접속을 가능케 하는 통합칩을 출시하고, CPU 4기가도 개발해냈다. 이런 세계적인 기업의 한국지사를 이끌어가는 김명찬 동문의 다짐은 그래서 늘 새로울 수밖에 없다. 강한 리더십으로 비전을 제시하는 CEO가 되고 싶다며 인격과 위험관리능력, 판단력, 예지력의 중요성도 늘 잊지 않는 덕목이라고 한다. “편집광만이 살아 남는다(only the paranoid survive)는 앤디 그로브의 말은 제 일과 삶을 이끌어주는 격언과도 같습니다.” 앤디 그로브는 인텔의 전 회장이다. 그의 확고한 사업철학과 삶의 자세에서 배울 점이 많고, 그래서 존경한다고. 김 동문은 그 말이 품은 뜻처럼 항상 고객에 집중하는 비즈니스를 펼치려 한단다. 그것이 곧 인텔코리아 대표로서의 신념이기도 하다. 새롭게 기획되어 추진되는 일의 전 과정마다 무섭도록 몰두하며 일을 풀어나가는 힘이야 말로 김 동문의 오늘을 만들어 온 산파였다. 꿈처럼 다가올 내일, 그 중심에 서서 아무리 빨리 앞서가도 결코 쉴 수가 없는 것이 CPU의 발전속도이고, 김명찬 동문을 비롯한 직원들은 이 속도의 앞에 서 있어야 한다. 지난 3월엔 인텔R&D센터 발족식이 있었다. 인텔코리아에게는 그 속도의 경쟁에서 더 앞서 나갈 수 있는 새로운 기회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 센터에서는 디지털홈과 무선인터넷 분야 기술이 개발될 예정이며, 본사에서 20여명이 파견돼 앞으로 한국전자통신연구원 등과 공동 연구를 진행하게 된다. 인텔 본사가 해외에 새운 연구개발센터 가운데 디지털홈에 초점을 맞춘 것은 우리나라가 처음이다. 머지않아 이 센터에서 우리들 삶의 방식과 세상의 풍경을 바꿔놓을 신기술이 움트게 될 것이며, 그 중심엔 김명찬 동문이 서 있다. 30년 전, 원천골 실험실에서 꿈을 키우던 한 전자공학도가 세계 최대 반도체 업체의 핵심이 되었다. 이제 그가 새롭게 펼쳐가는 기술경영의 진면목을 기대해 본다. 꿈처럼 다가올 신세계를 그려보면서 말이다. 김명찬 인텔코리아 대표 1978 아주대학교 전자공학과 졸업 1983~1987 LG상사 1988~2000 인텔코리아 영업부 시스템 세일즈 엔지니어, RCO Area(리셀러 영업부) 세일즈매니저, IA(인텔 아키텍처) 세일즈 이사, 상무 2001.3. 인텔코리아 대표 2004. 4. 정보통신의 날, 국무총리 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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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박성숙
- 작성일2008-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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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에너지학자, 아주의 에너지로 미래를 달리다 최기련 교수(대학원 에너지학과, 산학협력단장) 자신의 지식과 경험이 누구에겐가, 또 어디엔가 커다란 힘이 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충분히 행복한 사람이다. 더군다나 일생에 걸쳐 그러한 나눔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에너지학자, 최기련교수. 30년 넘게 빚어온 학자로서의 그의 그릇 안에는 세상 곳곳에 뿌려주고도 마르지 않을 샘이 담겨 있는 듯하다. 1973년부터 이어져 온 그의 이력이 보여주듯 우리나라 에너지 연구의 역사와 함께 한 그의 학문적 성과와 경험의 폭은 분명, 한 나라의 미래를 이끌어갈 만한 소중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에너지분야, 이만한 사람 또 어디 있을까 70년대 초반 서울대 공대시절, 데모하며 사회운동을 극렬하게 할 용기도 없었고, 그렇다고 술 마시며 낭만을 즐길만한 호방함도 없었다는 최교수는 자신이 당당하게 잘 해낼 수 있는 길을 선택했다. 또 길이 없더라도 부딪히는 과정에서 가치를 얻고자 노력했던 시간이었다. 외환은행 재직시절, 1차 석유파동이 일어난 74년부터 장기자원대책위원회에 파견근무를 한 것이 에너지와의 첫 번 째 인연이었다. 그 후로 한국동력자원연구소에서, 에너지경제연구원에서 또 한국전력공사에서 에너지와 관련된 숱한 연구를 진행하며 기획안을 제시하면서 황금 같은 경험과 실력을 쌓아왔고, 마침내 우리나라에서 에너지를 이야기할 때 빠뜨릴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프랑스에서의 에너지경제학 공부는 이런 그에게 더 큰 날개를 달아주었다. 점차 국내에서 진행되는 대형프로젝트의 대부분이 에너지분야에서 이뤄지는 이유로 최교수가 참여하는 국책 프로젝트의 수도 늘어만 갔다. 1992년부터 2004년까지 진행된 선도기술(G7)의 기획자문 위원장은 그 스스로도 만족스런 성과를 이루며 마무리한 자리였다. 아주대학교 에너지학과 개설, 최고의 보람 30년이 넘는 외길인생 동안 최교수의 기억에 아직도 선명히 남아 있는 일은 무엇일까. 한국전력에서의 일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86년 당시엔 장기외채의 반이 전력부분에서 일어날 정도로 전력부분에 대한 과잉투자가 논란거리였단다. 해결책으로 한전과 원자력연구소는 2001년까지 원자력발전소를 최소 33기를 지어야 한다고 했고, 최교수는 11기만 지어도 된다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반복되는 의견과 논리 대결 끝에 최교수가 설득에 성공했다. 발전소 1기에 5조원이었으니, 대략 100조원 정도를 아낄 수 있었던 것. 에너지경제학을 공부해온 학자로서 더 없는 보람을 느끼던 순간이었다. 그러나 최교수가 두고두고 최고의 자부심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주대학교 대학원과정에 에너지학과를 개설한 것이다. 88년 그 당시만 해도 에너지분야 전문가가 터무니없이 부족할 때였고, 새로운 교육을 통해 인재를 길러내는 것이 그의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아주대학교 에너지학과는 학부에는 없고 대학원에만 개설된 당시로서는 국내 유일의 학과였다. 지금 돌이켜봐도, 과감하게 투자를 해준 대우학원이 우리나라 대학원 교육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생각에 고마움을 느낀다고. 최 교수는 그동안 18명의 석·박사를 배출해 냈고, 현재 박사과정 7명과 석사과정 4명을 지도중이다. 그는 아주대 에너지학과를 학생들의 등록금에 전혀 의존하지 않는 에너지대학으로 만들겠다는 것는 꿈을 가지고 있다. 에너지학과의 실력을 제대로 평가 받아 외부에서 기금을 조성하겠다는 것이다. 그럴 만큼 충분한 실력도 있고 자신도 있단다. 효과적인 기술혁신의 룰 만들고 싶어 요즘 최교수를 가장 바쁘게 하는 일은 아무래도 산학협련단과 관련된 일일 것이다. 지난 3월, 산학협력단장으로 선임되었다. 올해부터 산학협력단장의 이름으로 학교의 모든 연구과제협약을 담당해야 하고, 수익사업도 유치해야 한다. "국제경쟁력을갖추는 대학이 되려면 등록금의존도가 낮아야 하는데, 산학협력단의 역할이 공고해진다면, 그래서 수익창출을 하여 학교의 투자여력이 높아진다면 지금보다 훨씬 발전하는 아주대가 될 수 있겠지요." 그래서 2년 동안 바삐 움직여야 한다며 기분 좋은 웃음을 보인다. 이렇게 자신이 몰두할 수 있는 일이 있고, 그래서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는 아주대학교 산학협력단장을 하면서 또 한가지 꿈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 기술혁신이 투자를 하는 만큼 잘 안 이뤄지고 있는데, 앞으로 기술혁신이 잘 될 수 있는 룰을 세팅하는 것’이라며, 이것은 실사구시의 학문을 하는 학자의 포부이기도 하단다. 지금까지 최 교수를 이끌어 온 힘은 무엇일까. “매주 빠짐없이 북한산에 갑니다. 힘드니까 오르지요 그래서 오를 맛이 나요.” 이 한마디로 충분한 답이 되지 않을까. 쉬운 길보다는 험하고 굴곡 있는 길이 더 매력적으로 보인다니, 아무래도 도전하면서 이뤄내는 길이 최 교수의 길이요, 또 오늘을 있게 한 에너지원인 듯하다 최기련 교수 학력 및 경력 1966.3~1973.8: 서울대 공과대학 자원공학과(공학사) 1979.5~1982.12: 프랑스 Grenoble대학원(에너지경제학 박사) 1973.8~1978.5: 한국외환은행(조사부 조사역) 1978.5~1986.6: 한국동력자원연구소(에너지정책연구부장) 1986.6~1987.2: 에너지경제연구원(에너지정책연구부장, 연구위원) 1987.3~1988.4: 한국전력공사(사장 정책담당 특별보좌역) 1988.4~1989.9: 아주대 교수(대학원 에너지학과) 1989.9~1994.9: 에너지자원기술개발지원센터 소장 1992.2~2004.2: 선도기술(G7) 기획자문 위원회 위원장 1994.9~현재: 아주대 교수(대학원 에너지학과) 겸 아주대부설 에너지기후변화연구소 소장, 산학협력단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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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2008-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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